해동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으뜸가는 가람, 김천 황악산 직지사|하늘에서 본 우리 땅 우리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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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enifer 댓글 0건 조회 49회 작성일 24-08-30 16:06본문
2024년 부산고구려$ 8월 29일 수정 ↑ 닥터 지바고의 바리끼노 별장눈 덮인 우랄산맥의 오지 바리끼노 설원에 얼어 붙은 낭만의 별장이 있었다. 러시아 지주 그로메코가(家)의 별장이다. 이 별장은 인민군에 의해 인민의 이름으로 몰수하오라는 팻말이 붙여졌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 닥터 지바고에서-그대의 재산은 인정할 수 없소. 모두가 인민의 공동의 것이오"레닌(유태인 골드만 가족에서 태어나 1/4 유태계인 울리아노프 가족에 입적, 어머니는 유태계, 아버지는 교사, 사법시험 최고 점수, 변호사 출신)은 10월 혁명(1917년 11월 7일)으로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족과 그 일원을 처형하고 “인민을 위해 낙원을 건설하겠다”고 연설했으나 20세기 후반에 와서 빵과 감자를 배급받기 위해 새벽부터 긴 줄을 서야 하는 일상이 날로 더해져 갔다. 1991년 9월 6일 고르바초프 소련(USSR) 대통령은『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땅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모델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옐친 러시아(RF) 대통령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우리 땅에서 그런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 국민에게 큰 비극이었다』라고 말했다. 공산주의·사회주의·전체주의의 계획경제에서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로 돌리기 위한 수순은 이렇게 하여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주도로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이 결성되어 정식 국가 명칭은 러시아(CIS)가 되고,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소련(USSR) 대통령이 사임함으로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 소련(蘇聯: USSR: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은 74년 만에 소멸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CIS)는 아직까지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고 서방과 맞서고 있다. 공산주의자는 재벌과 종교인 및 모든 자본주의 요소들을 적대시하고 타파대상으로 삼는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및 전체주의는 어디까지나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다. 러시아가 서방과 맞선다는 것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및 전체주의를 고수하고 있다는 증거다. 즉,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는 뜻을 재천명(再天明)하고 있는 것이다. 고르비(고르바초프의 애칭)와 옐친은 자유민주주의 성향이다. 옐친의 신임을 받고 총리에 오른 KGB(소련 비밀경찰) 출신 푸틴은 옐친과 고르비의 자유민주주의 성향의 버턴을 이어 받지 않았다. 여기서 결정적인 동서 양진영에 냉전문제가 재등장한 것이다. 즉, 소련의 구(舊) 이미지6 공산주의가 되살아 났다. 원래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행정구역이었다.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서기장 흐루시초프가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통 큰 선물을 하였다. 소련이 붕괴하자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포함 독립을 한다. 우크라이나 국민성의 성향은 우리나라처럼 두갈레 성향이다. 돈바스, 크림반도의 동남부는 스탈린의 공업화정책으로 러시아인이 많이 살고 공업이 발달하여 친러시아의 공산주의 사상이 강하고, 기름진 흑토의 평야가 많은 중서부는 스탈린의 곡물탈취 핍박을 받아 친사방적 성격이 강하다. 친 러시아 공산주의자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이 되었고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친 서방 자유민주주의자 젤렌스키가 대통령이 되어 동남부 공산주의 VS 중서부 자유민주주의의 대결로서 영토와 이념의 내분리 시작되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정부군에 2022년 2월 24일 선공을 했다. 러시아: 크림반도를 돌려다오.우크라이나: 지금은 내 땅이다.크림 자치공화국(크림반도): 나도 독립하고 싶어. 라는 분위기가 깔려있었다. 동구권이 공산주의를 버리고 EU(유럽연합)와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다자간 동맹]에 대거 가입하자 국경을 접해 좁혀오는 압박을 느낀 푸틴은 1) 2014년 3월 18일 러시아인이 많이 살고있는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점령하여 국민투표에 붙여 이기고는 합병 승인하였다. 서방은 이를 침략과 부정선거로 간주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2)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는 분리주의 세력이 새로운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돈바스의 두 ‘공화국’ 사이에 전쟁(‘돈바스 전쟁’)이 벌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5년 2월 12일 2차 민스크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우크라이나 정부 내 우파가 이 조약을 거부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고자 전쟁은 계속되어 협정 당사자는 협정을 무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돈바스 지역의 반 정부군 간의 8년 동안의 전쟁은 내국인 끼리의 영토와 이념분쟁이다. 즉, 내란이다. 우크라이 정부군의 입장은 실지회복 방어전의 방어자 입장이고, 돈바스지역 반 정부군은 도전적 선공자(先攻者) 입장인 셈이다. 3)푸틴은 크림반도를 이미 탈환했고 무기와 병사를 지원하여 동부 공업지역인 돈바스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을 선공하여 역시 국민투표에 붙여 이겨 2022.2.21 합병 승인하였다. 서방은 이것도 크림반도와 같이 역시 침략과 부정선거로 간주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젤렌스키는 NATO에 가입신청을 했으나 독일과 프랑스가 반대하여 미가입상태에 있었다. 푸틴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포착하여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러우전쟁으로 선공(先攻)한 것이다. 이렇듯 레닌의 러시아, 나치 히틀러의 독일, 마오쩌둥의 중국, 카스트로의 쿠바, 호찌민의 베트콩 북베트남,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 캄보디아, 미얀마 군부, 북한의 김일성 6.25남침,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 전부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 전체주의자들의 선공(先攻)이다. 1차대전 이전의 식민지 쟁탈인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은 이 글에서 제외된다. 식민지 정책은 스스로 나라들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후세인들의 평가다.젤렌스키 우크라이나는 NATO에 가입신청을 했으나 독일과 프랑스가 반대하여 옵저버의 자격으로 미가입상태에 있었다. 푸틴은 이를 마지막 절호의 기회로 포착하여 2022년 2월 24일 러우전쟁으로 선공(先攻)하였다. 평화를 사랑하는 핀란드와 역시 평화를 사랑하는 스웨덴(노벨상 수여국)도 선공을 서슴치 않는 러시아를 의식하여 중립을 내려놓고 NATO에 가입하였다. 팔레스타인 하마스, 헤즈볼라도 이스라엘에 선공(先攻)하여 전쟁을 하고있고, 후티반군도 서방의 유조선에 미사일을 쏘아 기름을 바다에 퍼뜨리고 있다. 모두가 이스라엘과 서방을 향해 선공(先攻: 먼저 공격)을 한 것이다. 선공(先攻)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을수 없다. 다만, 선공이라는 해석은 주체입장에 따른 변수가 존재하지만 이 경우에도 군사, 경제, 우방 동맹의 나라수 대비 국제적 힘의 논리는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공화국이다. 국내적으로는 적을 이롭게 하고, 국시(國是)와 충돌하는 사상(思想=이념: 理念)의 도전자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원만하지 않을 때 국론분열과 당쟁과 내란이 일어난다.외침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국내외적으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과 힘의 논리(Logic of Power)가 튼튼히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 ◆ 인류가 생긴 이래 갈고 다듬어 온 개인의 사유 소유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적절한 제도이다. 20세기 이후부터 마르크스 공산주의자들이 생겨나 자유민주주의자들에게 수없이 많은 도전을 해왔으나 자유민주의자들은 점잖게도 도도히 흐르는 푸른 물결처럼 방어해 왔다. 영원히 지킬 것이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항상 재벌타파를 부르짖고 사기업을 질시하며 공공의 소유와 국영기업이 주(主=TOP)가 되기를 추구한다. 2018년 12월 12일 게시(揭示) 2022년 9월 28일 최종 수정 문장이 길므로 색상 밑줄 친 부분만 읽으셔도 문...◆ 전부가 일설이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던 레닌과 스탈린 시절 소련에서 약 2,000만 명이 굶어 죽었고, 또, 약 2,000만 명이 학살당했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시절인 1958~1961년 가뭄과 공산주의화, 인민공사화의 원인으로 4,500만 명이 굶어 죽었고, 1966~1976년 홍위병 주도 문화대혁명 기간에 수백만 명의 교수 지식인 및 시장경제 사유 소유권의 재벌과 부자와 지도층 인사들이 맞아 죽었다. 김일성 적화통일 목적 남침 6.25전쟁으로 북한은 300만 명이 죽었고, 또 6.25전쟁 이후 북한은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든 패자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정사로 기록하지 않는다. 추측이 무성하지만 그 추측이 결과적으로 거의 맞아들어간다.전부가 마르크스 공산화 이념이 원인을 부산고구려$ 몰고 왔다. 역사적으로 마르크스 이론의 공산주의자가 자유민주주의자를 선공(先攻)하였고, 자유민주주의자는 항상 방어만 해 왔다. 러시아, 쿠바, 리비아, 중국, 인도차이나반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군부정권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팔레스타인 하마스·헤즈볼라·레바논·후티 반군·이란 수니파 VS 서방세계가 그 예이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로 한국 -러시아·중국·인도차이나반도 국가들·쿠바(최근 수교)·리비아의 경제 수교는 원만히 이루어지고 있다. 공산주의·사회주의·전체주의국가는 인민을 잘 살기 위한다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국가는 국민을 잘 살기 위한다고 말한다. 두 진영에서 목적은 똑같다. 다만,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공산주의·사회주의·전체주의 국가를 사용하느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사용하느냐의 차이다. 그런데 국내적으로 내국인들끼리 이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국론분열로 이념의 갈등을 일으키고있다. 특히 한국과 대만같은 분단국에서는 더욱 심하다. 중동에서는 영토 없이 2천년 방랑생활을 해 왔던 유태교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들어와 살게 도와 준 영국·미국과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팔레스타인의 이슬람교 간(間)에 충돌이 계속 생기고 있다. 즉, 영토와 사상(=이념)전쟁이다. 종교도 이념이라고 전광훈 목사가 강조하고 있다. 추신: 레닌이 주도한 10월 혁명으로 탄생된 볼셰비키당이 스탈린의 사회주의·공산주의·전체주의로 공고히 다져지면서 백군이 패하는 순간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비극이 기인되었다. 우크라이나는 74년 동안의 소련(USSI)에서 벗어나 독립국가연합(CIS)인 공화국으로 독립한 우크라이나인은 자유민주주의의 성향이 짙으나 남부 크리미어 반도와 동부 돈바스 지역은 러시아인이 많이 살고있어 친 러시아 성향인 사회주의 세력 확대로 현재 동맹이 없다는 미흡이 발견된다. 2022년 4월 14일 러시아는 스웨덴과 핀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한다면 적이 늘어난다며 발트해 군사력 강화를 경고했다.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는 우리의 신라·백제·고구려처럼 한 뿌리에서 나온 동슬라브계 민족으로서 AD 8~9세기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를 중심으로 슬라브민족의 최초 국가인 키에프공국을 세웠는데 루스의 땅, 러시아(Russia)의 시작이었다.칭키즈칸의 몽고군이 13세기 전반(1238년)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고, 1240년 칭기즈칸의 장남인 주치의 차남 바투의 킵차크 칸국(汗國: 한국)인 몽골제국이 키에프를 침공한다. 10주간의 키에프 시민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쇠뇌로 성벽을 허물고 키에프성을 함락시킨다. 칭기즈칸은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하면 기득권을 인정하고 점령 통치를 상당 부분 위임하였으나, 사마르칸트성의 경우처럼 저항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씨를 말리는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키에프성이 함락된 후, 엄청난 살육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 후 200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이때 나라가 갈려서 친 몽골파와 반 몽골파로 나뉜다. 친 몽골파는 훗날 러시아로 이어지고, 반 몽골파는 훗날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세력이 된다. 400여 년간 떨어져 지낸 기간에 러시아 세력은 루스 차르국을 세우고 승승장구하여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우크라이나 세력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종속되며 힘겨운 시기를 보내며 유럽 영향을 많이 받아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게 되어 한 뿌리였던 두 나라는 완전히 달라졌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와 인연이 깊은 얄타 회담이 열렸던 크림반도를 포함, 7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 벨라루시,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인구는 4천7백만 명, 영토는 한반도의 3배, 80%가 평야이다. 황갈색의 흙도 한 번만 뒤집으면 새까만 흑토가 나온다. 외세의 침공에 끝없이 시달려온 나라이다.14세기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당시 강국인 인접국 리투아니아에게, 16세기에는 폴란드에게 분할 점령된다. 러시아는 1480년 모스크바 공국이 독립하여 17세기 초엽 표트르 1세의 절대주의체제로 발트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지중해로 진출하려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저지로 실패하여 극동진출로 방향을 바꾸었다. 1864년(고종 1)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이래 극동의 부동항 정책을 강력히 추진, 91년 시베리아 철도 착공, 95년 삼국간섭, 96년 러·청밀약에 의한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설권 획득, 98년 여순·대련 조차, 이어 1900년 북청사변에 출병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의화단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계속 만주에서 철병하지 않다가 러·일전쟁(1904~05)에서 패배하였다.레닌 다음에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농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로 강력히 추진했다. 귀족과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집단 농장에 소속할 것을 강요받았다. 소수 민족들까지도 강제 이주시켜 집단 농장에 포함시켰다. 연해주와 극동지역의 20만 명의 한인(韓人)들도 1937년 9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두 달 사이에 영문도 모른 채 짐짝처럼 실려가 ‘스탄’자가 붙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허허벌판에 내려졌다. 오늘날 약 55만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그때 살아남은 한인(韓人)들의 후예들이다.사회주의 혁명을 따르지 않는 농민들에게는 가혹한 억압을 받고 목숨까지 잃었다. 농민들은 극히 일부의 배급만을 받을 수 있었고 생활은 나날이 궁핍해졌다. 열심히 일해도 나아질 수 없는 삶은 농민들의 노동의욕을 크게 떨어뜨렸다. 19세기 러시아가 강성해지며, 최종 보스 격인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들어서며 우크라이나와 합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각각 살던 두 세력은 잘 맞지 않았고, 우크라이나에서는 계속 독립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비옥한 농토(전 국토의 41%), 어마어마한 곡물 생산량을 포기할 리 없었던 소련은 우크라이나 독립군을 가혹하게 탄압하여 우크라이나 독립을 무산시킨다. 러시아 황제의 압제에 견디다 못해 도망 온 난민들이 바로 코사크족으로 이들이 우크라이나에 정착하며 폴란드에 항거하여 우크라이나 민족성을 유지 보전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이 당시를 무대로 한 영화가 “대장 부리바”이다. 폴란드가 터키의 침공을 받자 폴란드에 인접한 기마족 코사크는 폴란드와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하지만 폴란드가 배신하자, 코사크족은 대초원을 되찾기 위한 재기와 복수를 다짐한다. (대장 부리바로 분장한 율부린너 ). 1654년부터 러시아 황제 알렉세이에게 합병되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해 소련 중앙정부의 장악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1990년 7월 16일, 336년간의 러시아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된다. 물론 그 중간에 2차대전으로 나치의 침공이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우크라이나는 키에프를 방어하기 위해 72일간 저항하였으며 그동안 폭격으로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되었다. 칭기즈칸의 장손 바투의 키에프 침공 때 방어한 저항정신과 같다.1972년 스탈린이 소련 지배자가 되며 상황은 악화된다. 스탈린은 집단 농장화 정책을 펼치며 억지로 부농들과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국유화의 집단 농장으로 개편해 이상적인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정책을 펼치며 토지를 몰수했다. 그리고 농민들을 이 집단 농장으로 데려가 일을 시켰는데, 농민이 많았던 우크라이나가 큰 타격을 입었다. 우크라이나에서만 350만 사람들이 굶어 죽는 홀로도모르(우크라이나 대기근)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반 소련 감정은 깊어진다. 한편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지도자가 되자, 소련은 크림반도와 현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을 우크라이나에게 떼어주었는데, 선의라기보다는 나중에 편한 대로 관리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나눈 차원이었다. 1943년 11월 6일 나치에서 해방될 당시 키에프의 인구가 겨우 18만 명만 남았다고 하니 전전의 93만 인구를 감안하면 5명 가운데 1명만 살아남은 셈이다. 우크라이나가 지금도 축구 강국이지만 점령 기간인 1942년 여름, 키에프 클럽 축구팀과 나치 군 사이에 친선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이때 져주기로 하고도 키에프팀이 5:3으로 이기자 그 가운데 스타 플레이어 4명을 총살한 나치의 잔혹상은 유명한 축구사의 “죽음의 대전”으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저항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스탈린 치세 동안 모든 성당이 허물어지는 종교적인 박해를 받으며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났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이 민족은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공하여 정복한 기록은 없고 침략만 당하여 타 민족의 지배를 받고 부산고구려$ 산 비참한 역사의 기록뿐인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아래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1991년 소련 해체 때 우크라이나도 독립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하고 난 후 소련이 내어 준 동부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는 친 러시아 사람들이, 기존 영토는 친 유럽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우크라이나는 내부 갈등이 심해졌다. 특히 스탈린은 동부 우크라이나에 많은 공장을 지었기에 많은 러시아인들이 그곳에서 일자리를 잡고 있었다. 즉, 서부 우크라이나는 농업이 발전하고 역사적으로 유럽 영향을 많이 받은 친 유럽파가 많으며 주 언어도 우크라이나어였던 반면, 동부 우크라이나는 중공업 중심, 대부분 러시아 출신 친 러시아파가 많아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독립공화국으로 속해있다가 1991년 소련의 몰락과 연방에서 탈퇴하여 독립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으로부터 176기의 핵미사일과 1800기의 핵탄두를 물려받아 세계에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핵을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됐다. 핵을 완전 폐기하는 대신 경제 지원과 안전보장을 제공받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핵문제 해결 방식이다. 당시 러시아의 안보위협을 이유로 핵무기 폐기를 거부한 우크라이나에 대해 미국, 영국, 러시아까지 참여한 다자간 합의각서를 통해 집단안전보장을 해줌으로써 핵무기 폐기를 성사시켰다. ↑하늘색으로 칠해진 곳이 나토 회원국이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끝.*러시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돈바스의 문제1) 크림(일명 크리미아) 반도의 문제: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지도자가 되자 소련은 크림반도와 현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을 우크라이나에게 떼어주었는데, 선의라기보다는 나중에 편한 대로 관리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나눈 차원이었다. 크림 공화국은 자체 헌법과 정부, 의회를 가지고 있지만 행정 수반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도 독립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하고 난 후 소련이 내어 준 동부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는 친 러시아 사람들이, 기존 영토는 친 유럽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우크라이나는 내부 갈등이 심해졌다. 크림반도 거주민들 대부분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친러 성향을 보인다. 또한 크림반도는 부동항이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로 우크라이나도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EU는 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했고,러시아는 조건 없는 차관을 제공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조건 없는 차관과 러시아의 천연가스 쪽으로 기울어 EU와의 경제협력 조약을 무기한 연기하고 러시아에 경제를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태도를 취하자, 서부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이 결정에 분노하여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에서 친 EU 국민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바로 유로 마이단이다. 유로(EU) + 마이단(우크라이나에서 시위가 일어났던 광장). 시위의 규모는 80만 명을 넘어 역대급으로 확산되었다. 납치, 고문이 자행되었으며 총에 맞아 죽는 시위 참여자가 수십 명에 달했으며 부상자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 대 혼란에 빠진 우크라이나를 뒤로하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피신했다. 혼란을 틈타 러시아는 2014년 3월 크림반도에 군사를 파견하여 크림반도를 접수한다. 우크라이나 반발을 뒤로하고 러시아는 크림반도 주민들에게 러시아와 합병 찬반 투표를 실시했고, 당연히 러시아인이 많았던 크림반도 주민들은 97% 압도적인 찬성 득표율로 2014년 3월 크림 자치공화국은 러시아와의 합병 조약에 서명하였다. 우크라이나는 반발했지만, 러시아는 옛날에 준 땅이고 주민들도 찬성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위기에 처한 우크라이나는 유엔에 중재를 요청한다. 유엔 안보리 15개 이사국은 크림반도 주민 투표 무효 결의안을 상정하였으나 러시아·중국 기권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유엔·미국 등 서방국가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자체를 부정선거로 간주하고 우크라이나 헌법과 국제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로 간주하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각주. 그 옛날 또 하나의 크림전쟁이 있다. 1853년 제정 러시아가 흑해로 진출하기 위하여 터키, 영국, 프랑스, 사르디니아 공국 연합군과 벌인 전쟁. 1856년 러시아가 패배하여 남진 정책이 좌절되었으며, 나이팅게일의 간호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이팅게일이 영국군의 사망률을 눈에 띄게 감소시킨 점, 그리고 밤마다 등불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닌 점 등의 이미지가 합쳐져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서 보도하여 나이팅게일을 더욱 존경하게 된다.2) 돈바스 문제: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고 23년이 흐른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계 주민 비중이 가장 높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등 동부 2개 주가 분리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내전의 불씨를 당겼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홀로도모르(Holodomor)의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상처를 새삼 후벼파는 행위가 되었다. 홀로도모르(Holodomor)가 없었더라면 합쳐서 돈바스라 불리는 이곳에 러시아인이 몰려들어 올 일도 없었다. 원래의 토착 우크라이나인들이 홀로도모르(Holodomor)로 다 죽고 일할 만한 사람 대부분이 사라져서 버려진 비옥한 이 땅에 스탈린이 러시아인을 이주시켜 친 러시안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은 최대의 석탄 산지이고 스탈린이 공장을 많이 지어 우크라이나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이다. 앞서 크림자치공화국의 주민 투표 결과는 동부의 돈바스 지역의 친러 성향 분리독립주의자들까지 자극했다. 동부 우크라이나 땅도 소련이 준 것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2014년 5월 동부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지역에서 분리독립 안건으로 주민 투표를 실시했고 89% 주민이 독립에 찬성했다.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으로 자치를 선포하고,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독립을 주장한다. 이 둘은 미승인국이다. 미국과 유럽은 투표가 민주적인 절차에 어긋났다며 승인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이에 정부군과 자치군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한다. 러시아는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우크라이나는 동부 분리독립 반군 세력에 정부군을 파견하여 내전이 발발한다. 동부 돈바스 지역 이름을 따 돈바스 전쟁이라고 불리며 2014. 4. 6~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정부군은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까지 근접했다. 2015년에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우크라이나에 귀속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프랑스, 독일 정상이 합의한 정전협정인 민스크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지켜지지 않고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이때까지 러시아는 동부 반군에게 병력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반군을 진압하자, 러시아가 2015년 직접 돈바스 지역에 군대를 파견한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군력에 밀려 다시 후퇴했고, 이 돈바스 전쟁은 계속 이어저서2014년 이후부터 총 29회 휴전 선언이 있었고 가장 최근 2020년 7월 휴전했지만, 곧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푸틴 대통령은 2022년 2월 21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러시아군의 진입을 명령했다. 미국과 유럽은 이에 강력 반발하며 러시아에 대한 제재의 뜻을 밝혔다.미국과 유럽은 푸틴 대통령의 이런 조처에 대해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들 돈바스 지역에서 미국인의 새로운 투자와 무역, 금융 거래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추가적인 제재 조치도 곧 뒤따를 것이라며 이번 제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내릴 제재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덧붙였다.샤를 미셸 유럽연합(EU)은 “유럽연합은 이런 불법적 행위에 대해 제재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리즈 트러스 영국 외교장관도 트위터로 영국 정부가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제재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석탄, 부동항, 가스관, 비옥한 흑색 농토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운송하는 길목에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부산고구려$ 우회하는 가스관 노르드스 트림과 투르크스 트림을 건설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고 있다.근대사에 러시아 혁명은 2월 혁명으로 1917년 구력 2월 22일(양력 3월) 제정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켰다.1917년 10월 혁명으로 유태인(猶太人: Jew)인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당¹(구 소련 공산당의 별칭)이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수립하였다. 레닌은 종교의 자유와 사유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왕실·귀족·부유층의 재산을 빼앗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적백 내전(赤白內戰: 1917년 11월~1922년 10월)이 일어나 연합 8개국과 독일 일본도 백군을 도왔으나 레닌·트로츠키·스탈린의 적군에 백군이 패했다. 7백만 명에서 1천2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거의 대부분이 민간인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의 적백 내전(赤白內戰)은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 중 가장 큰 국가적 재앙으로 묘사되기도 한다.1917년 볼셰비키¹ 혁명(革命)을 이끈 레닌(1870~1924,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이 유태계 혈통임을 명확히 입증해 주는 문서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레닌이 타계한 뒤 유가족이 스탈린에게 반유태주의 정책을 철회해달라고 탄원했던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레닌이 가난한 유태인 집안 출신임을 유가족을 통해 알게 된 스탈린은 유가족에게 비공개를 명령했다. 러시아는 레닌이 유태계 혈통이란 사실 자체가 그의 명성에 오점이 될 만큼 전통적으로 반 유태주의 정서(反猶太主義情緖)가 강하다.볼셰비키¹ 혁명(革命)은 레닌·트로츠키 등 유태인의 혁명이라고 할 만큼 혁명의 간부들은 쟁쟁한 유태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러시아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유태인만의 특별 자치구를 만들기로 결정한다(1924년). 이의 실행은 1924년 1월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맡아서 한다. 그는 광대한 러시아에 살고 있는 다양한 민족을 통치함에 있어 ‘민족을 기준으로 한 국가’라는 정책을 채택한다. 이에 의거 스탈린은 니콜라이 2세가 중국에서 빼앗은 지역에 러시아 사회에서 배척받고 있던 유태인을 러시아화하기 위해 이주를 권장했던 시베리아 동쪽 중국 접경 지역 ‘비로비잔’에 유태인 자치구역을 설정하고 러시아에 살고 있는 유태인을 전부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자치를 허용했다. 하바롭스크에서 서쪽으로 약 180km 떨어진 ‘비로비잔’은 러시아 연방을 이루는 89개 행정 구역 중 유일한 자치주이다. 스탈린의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1928년부터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됐는데 이주 과정에서 무수한 유태인들이 혹사, 굶주림, 혹한에 의해 죽어갔다. 이주에 응하지 않은 유태인들은 사정없이 연행되어 총살당해 이때 희생당한 유태인이 137만에 이르렀다. 이런 탄압과 규제는 후르시초프가 등장하면서 풀렸다. 규제가 풀리면서 이곳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이나 미국 등으로 많이 나가 2%인 1만 5천까지 줄었다. 레닌(1870. 4. 22~1924. 1. 21, 54세 사망)은 1918년 암살 미수에 의한 총상 후유증과 과로로 몸 져 누우면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레닌은 조지아(그루지야) 출신 스탈린이 난폭하고 관용을 베풀 줄 모르는 성격을 우려하였고 병석에 있는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고 능멸하기까지 하여 죽기 전에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시킬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하였다. 레닌은 1922년 뇌일혈로 쓰러진 뒤 스탈린에게 자신을 독살시켜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장은 몇몇 대의원들에게만 회람되었을 뿐이었고 이미 스탈린이 비밀경찰(체카)과 공산주의 당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서기장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미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에 의해 레닌의 유언은 무시되었다. 스탈린은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는 레닌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를 미라로 만들어 자신이 성대한 장례식을 주최하며 후계자의 이미지를 스스로 굳히고, 트로츠키를 철저히 소외시켰다. 스탈린이 레닌 운구행렬의 가장 앞에 섰던 것에 비해 트로츠키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는 소련 국민들이 그에 대한 신망을 잃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1924년 1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을 지나는 레닌의 100만 여명 조문 행렬. 참배객들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레닌의 관이 놓인 모스크바 ‘돔 소유자’ 밖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사흘 뒤인 1월 24일 레닌의 장례식이 붉은광장에서 거행됐다. 장례식 후 레닌의 시신은 당초 붉은광장에 영묘를 만들어 매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추모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혹독한 겨울에 레닌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이를 본 후계자인 스탈린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레닌을 신격화하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수순으로 미라로 안치했다. 지금도 러시아 과학자들이 2년마다 유리관에서 그의 시신을 꺼내 방부처리를 다시 하고 있다. 반면 1953년 3월 뇌출혈로 사망한 스탈린의 시신도 역시 미라로 레닌 영묘에 나란히 놓였지만 1962년 니키타 흐루시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스탈린 격하운동’에 따라 화장됐다.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과 적백 내전을 치른 트로츠키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서유럽의 혁명 없이 러시아 혁명만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전 세계 공산주의화를 함께 이루어야 한다는 ‘세계 공산주의 혁명론’을 내세웠으나 스탈린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주장하면서 팽팽히 맞섰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고 적군(赤軍)을 창건해 내전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조직가이자 사회주의 사상가, 전략가였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해 혁명의 배반자, 반 혁명분자로 몰려 추방당해 멕시코에 망명해 있을 때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1940년 8월 20일, 61세에 암살당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혁명가의 비참한 최후였다. 스탈린은 이에 그치지 않고 트로츠키의 부인, 자식, 친인척, 측근 인사들과 관계된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다. 트로츠키는 회고록에서 레닌이 스탈린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 소련(蘇聯: USSR)유태인인 마르크스의 신봉자들은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에 도전했다. 19세기 300년 재위 로마노프 가(家) 황제 5명 중 알렉산드르 2세는 재능 있는 유태인을 발탁해 근대화 사업에 참여시켰으나 알렉산드르 3세 때 ‘포그롬(동유럽 유태인 박해)’으로 20만여 명의 우크라이나·러시아·폴란드·루마니아 거주 유태인이 살상되었다. 포그롬을 피해 러시아 거주 유태인 250만 명이 미국과 서유럽으로 피신했다. 러시아에 남은 유태인 혁명가들은 비밀리에 공산혁명을 준비했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구성된 주요 혁명 간부 중 85%가 유태인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유태인 레온 트로츠키는 10월 혁명 직전 레닌의 볼셰비키¹에 합류하여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소비에트연방 창건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혁명 초기에는 외무장관을 지냈다. 1918년 적군(赤軍)’을 조직해 황제파 ‘백군(白軍)’의 반 혁명 봉기를 진압했다. 공산혁명의 국제화를 촉구하는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선언문도 기초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지²를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노동자 중심의 10월 혁명은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¹의 승리로 끝났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1917년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볼셰비키¹가 그 필요성에 대해서 항상 얘기해 왔던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0월 24일, 25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평화와 사회주의의 이름 아래 승리할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1918년 7월 17일, 300년 재위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 러시아 차르(러시아 황제 칭호)인 비운의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과 그 일원이 외래인인 유태인 간부 유로프스키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보수 러시아인의 자존심은 무관심했을까? 러시아 혁명에 유태인이 다수 주도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유태인이 부산고구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선봉이던 다양한 좌익 정당과 혁명조직에 지나치게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서부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을 보면 90퍼센트가 유태인이고, 러시아 전체적으로는 40퍼센트가 유태인이다. ---♡♡♡--- 21개 공화국에는 아디게야 공화국, 알타이 공화국, 바시키르 공화국, 부랴트 공화국, 다게스탄 공화국, 인구시 공화국, 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 칼미크 공화국, 카라차예보체르케스카야 공화국, 카렐리야 공화국, 코미 공화국, 마리엘 공화국, 모르도바 공화국, 사하 공화국(야쿠트), 북오세티야 공화국(세베로오세티야), 타타르 공화국(타타르스탄), 투바 공화국, 우드무르트 공화국, 하카스 공화국, 체첸 공화국, 추바시 공화국 등이 있다. 국가 체제는 연방제이나 대통령 선출제이고 임기는 4년, 중임이 가능하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제2대 대통령직을 맡았던 블라디미르 푸틴은 2012년 3월 3선에 성공하여 5월 7일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독립국가연합은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10개 공화국의 연합체로 영어 약자로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이다. 러시아가 대표적 국가이다.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蘇聯)USSR(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의 해체 요약: 참고 출처, 시사상식사전.소련은 1922년부터 1991년까지 69년 동안 존재했던 여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구성된 최초의 사회주의 연방 국가이다. 동유럽에서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15개의 독립공화국과 20개의 자치공화국, 8개의 자치주, 10개의 민족관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독립공화국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아제르바이잔·몰다비아·키르키스스탄·타지키스탄·아르메니아·투르크메니스탄·그루지아[조지아(Georgia)라고도 함, 스탈린 출신국으로, 스탈린은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남]·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이 있었다. 다양한 소수민족들로 형성되어 각 민족은 민족어와 공용어인 러시아어를 사용하였고 카톨릭, 개신교, 희랍정교, 이슬람교, 불교, 샤머니즘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하지만 공산당 일당독재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의 연방을 이루고 지역적인 행정 단위에 대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독립을 사실상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소련은 연방이었지만 가장 중앙집권화된 국가였다. 1924년에 레닌이 죽자 스탈린은 192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세 차례의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국민경제의 사회주의화와 공업화가 병행되었으며,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1934년 말부터 1938년까지의 대숙청을 통하여 스탈린 독재 정권을 확립,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발언을 통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대전이 끝난 뒤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생겨남에 따라 소련은 그 지도국이 되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 및 그라스트노스트를 기초로 한 일련의 개혁 정책의 여파로 자유화 물결이 일어 1989년 동·서독이 통일되는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를 지향하게 되면서 보다 급진적인 개혁의 소리가 높아갔다. 1991년 보수파의 쿠데타가 발생, 이를 무력화시킨 옐친이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고, 1991년 9월 소련 인민 대표 대회가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옐친의 주도로 12개 독립공화국이 1992.1.1 독립국가연합(CIS)을 형성하여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사임하고 소련(USSR)은 정식으로 해체되었다.독립국가연합[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출처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CIS는 1991년 9월 발트 3국이 소련에서 분리하여 독립한데 이어 나머지 공화국들도 각기 독립국가로 출범하여 그 해 12월 소련을 해체하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느슨한 형태의 10개 공화국의 국가 연합체가 형성되었다. 1.러시아 (1991) 2.몰도바 (1991) 3.벨라루스 (1991) 4.아르메니아 (1991) 5.아제르바이잔 (1991) (1992년10월에 탈퇴했으나1993년9월 재가입) 6.우즈베키스탄 (1991) 7.우크라이나 (1991) 8.카자흐스탄 (1991) 9.키르기스스탄 (1991)10.타지키스탄 (1991)이상 CIS의 10개의 각 공화국들은 경제 동맹 체제는 아니고 단순 협력 체제이다. 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관세동맹체제도 아니다. 구소련이 해체되자 힘없는 작은 국가들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외세로부터 군사적 보호를 받고자 한 부분적인 안보 협력 체제의 전단계이다.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와는 다른 성질의 안보 협력 체제이다. 가입 탈퇴 등이 수시로 발생되는 연합체제이다. 자유무역협정 체제는 더더욱 아니다. 러시아는 세계 무역기구(WTO) 비회원국이므로 자유무역협정 체결권 자체가 없다. 독립국가 연합(CIS) 간 역내 거래 시 관세 부담 조건이 좋은 것뿐이다. 각국 간 경제 수준을 보아 유럽연합 같은 구성 자체가 어려운 국가 경제들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은 2005년 탈퇴한 후로 준 회원국이 되었고, 구성 2년 후 1993년 10월 그루지야(조지아)가 가입하였다가 2008년 러시아와의 전쟁 후 탈퇴함으로써 현재 10개국이 되었다. CIS의 행정수도는 벨라루스의 민스크이다. CIS는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있으나, 1991년 12월 8일의 브레스트 합의, 21일의 알마아타 합의, 30일의 민스크 합의 등 일련의 합의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주권국가의 연합체로서 회원국의 독자적인 상호 동등성을 보장하고 있다. CIS의 조직은 최고 협의기구인 국가원수평의회(정상회담)와 그 산하의 총리 협의제, 그리고 가맹국의 해당 장관들로 실무를 담당하는 각료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정상회담은 연 2회 이상 개최하고, 협력 체제의 효율적 확립을 위하여 6개월 임기의 순회 의장제를 도입하였다. 경제적으로 74년간의 소련 시대에 추진된 각 공화국 간 산업의 특화·분업 정책에 따라 러시아·우크라이나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개개의 공화국이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현실 때문에 경제정책의 상호 조정, 단일 화폐의 사용, 자유로운 경제교류의 보장 등 단일경제권 형성을 지향하고 있다.군사면에서는 CIS단일군 통수권에 의한 집단안전보장체제 구축을 표방하고 있다. 또한, 제8차 CIS정상회담이 1993년 1월 22일 민스크에서 개최되어 CIS헌장 서명과 루블화의 공동 결제 화폐 인정 등에 합의하였고, 1993년 5월 14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9차 CIS정상회담에서는 경제동맹 창설에 관한 선언문 채택, CIS조정협의회 및 집행사무국 설치 등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통제 및 통합군 통수권 문제를 둘러싼 주도권 다툼, 회원국 간의 격차에 따른 경제개혁 조치의 부조화, 민족 갈등 등 산적한 문제점으로 말미암아 CIS의 존립기반이 위협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주요 지역 분쟁을 살펴보면, 나고르노-카라바흐 사태, 타지키스탄 내전, 그루지아-압하지아 분쟁, 남오세티아 문제, 몰도바 트란스드네스트르 분쟁 등이 있다.한편, 1995년 2월 10일 알마아타 정상회담에서는 집단안보체제의 군축에 합의하는 한편, 평화·안정증진 협정을 포함한 일련의 상호 협력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앞으로 CIS는 역대 국가 간의 민족·안보·경제 관계를 중심으로 개편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 존속 및 발전 여부는 러시아의 지도력과 각 공화국의 의지, 국제정세 변화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2008년 현재 CIS의 주축이 되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구성 공화국 모두와 수교 관계를 맺고 있으며, 북한 역시 마찬가지이다. -출처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끝.다음은 근래 한국과 러시아 간 주요 외교 일지 요약. 1986년(전두환 재위) 김일성은 구 소련을 방문하고 고르바초프와 회담하면서 구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는 것은 2개의 조선을 고착화시키는 일이라고 경계하였으며, 그 뒤에도 같은 뜻을 여러 차례 표시하였다. 한러 관계의 발전은 1988년(노태우 재위 원년) 2월 25일 제6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북방 정책과 고르바초프가 같은 해 9월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을 계기로 적극화된 한국과의 경제협력 의사가 맞물리면서 급진전되었다.1989년(노태우 1년)의 경우 러시아는 한국으로부터 섬유·신발류 2억 800만 달러를 수입하고, 어류·석탄·원목을 3억 9200만 달러 상당 수출하였다. 이해 4월에는 소련 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가, 이어 7월에는 한국무역진흥공사 모스크바 사무소가 각각 개설되었다. 이로써 양국 간 교역은 종래의 간접무역 방식에서 직교역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1990년(노태우 2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에 제1차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이해 9월 30일, 한·소 국교가 수립되었고, 곧바로 12월에는 제2차 한·소 정상회담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해 초, 한국의 주요 부산고구려$ 무역회사들이 모스크바에 지사를 설치하였다.이해, 러시아는 북한으로 원유·면화·직물류·공업 설비 등 15억 1천7백만 달러를 수출하고, 북한으로부터 마그네샤크링카·의류·강철·축전지 등 10억 4천7백만 달러를 수입하였다.한편, 러시아는 ‘2개의 코리아’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는 북방 외교로 소련과의 수교 과정에서 1991년 30억 달러의 경제협력 차관 제공 협정을 맺었다. 당시 우리나라 외화보유액 135억 달러의 2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차관액 14억 7천만 달러만 집행된 상황에서 그 해 12월 소련이 해체됐다.1991년(노태우 3년) 30억 달러의 차관 제공을 포함하여 자원·과학기술·수송·통신 분야에 걸친 각종 협력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대러 차관 제공 30억 달러는 당시 우리나라 외화보유액 135억 달러의 2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차관액 14억 7천만 달러만 집행된 상황에서 그 해 12월 소련이 해체됐다. 14억 7천만 달러 중 10억 달러는 한국 시중은행들이 한국 정부의 지급보증하에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조건으로 빌려줬다. 나머지 4억 7천만 달러는 러시아가 한국 상품을 사준다는 조건으로 수출입은행이 빌려줬다. 불곰사업이란 한국이 1991년부터 당시 소련에 제공한 14억 7천만 달러의 경협 차관의 일부를 현물로 들여오기로 하고 1995년부터 추진키로 한 러시아 무기도입 사업을 말한다. 차관 중 4억 6천만 달러는 탱크·헬리콥터·원자재 같은 현물로 갚았다. 이해 4월 제3차 한·소 정상회담이 제주도에서 열렸다. 구 소련은 또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도록 지원하였다. 구 소련의 이러한 대한정책은 북한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이해 12월 한국은 러시아연방을 소련의 적법한 후계국으로 공식 인정하고, 러시아는 소련이 한국에 지고 있는 부채 17억 달러를 공식 승계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연해주와 사할린의 한인 동포 6만여 명을 포함, 15만여 명의 교포가 살고 있어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2년(노태우 4년) 11월, 보리스 옐친 대통령 서울 방문. 한국전쟁 등 과거에 대한 유감의 뜻을 밝히고, 양국 간 기본 조약은 한·러관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동반자 관계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이해 8억 6천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1993년(노태우 5년) 한국은 러시아의 관세특혜국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어업협정 체결로 러시아 수역 내 한국의 어획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한국은 러시아와 과학기술 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첨단 분야 연구를 공동으로 추진하고, 러시아가 보유한 첨단 기술의 이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1993(김영삼 1년)부터 한국은 자원 개발과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 러시아의 각종 대규모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1994년(김영삼 2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이 국빈으로 모스크바 방문. 양국 간 공동 선언인 `모스크바 선언'을 포함한 5종의 양국 간 협정에 서명.교역량은 1991년(노태우 3년) 12억 2600만 달러, 1992년(노태우 재위 4년) 8억 6000만 달러, 1993년(노태우 재위 5년) 약 15억 7000만 달러(수출 6억, 수입 9억 7000만).1995년(김영삼 3년) 9월,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 서울 방문. 양국 간 경제.무역 및 과학.기술 협력 조약 체결. 동시에 북한에 대해서 9월, 6·25전쟁 발발 시 러시아의 자동 군사개입 조항을 담은 ‘조·러 상호 원조 및 우호 협력 조약’을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폐기하였다. 불곰사업으로 1995년부터 1998년까지 1차 사업을 통해 T-80U, BMP-3, 휴대용 대전차 유도탄 METIS-M, 휴대용 대공미사일(IGLA)을 도입했다.1996년(김영삼 4년) 5월, 공로명 외무장관 모스크바 방문. 한반도 평화 문제와 이에 대한 러시아의 참여 방안 논의.1997년(김영삼 5년) 7월 4-9일: 올레그 스이수예프 부총리를 단장으로 한 러시아 대표단 서울 방문. 양국 정부 간 제1차 경제.무역 및 과학.기술 협력위원회 개최. 옛 소련의 채무 청산 문제 논의. 7월 23-26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외무장관 서울 방문. 양국 대통령 간 직통전화 개설, 양국 대사관저 토지 교환, 서울시내 옛 러시아 공관부지 문제 등에 관한 협정, 11월 방산·군수협력 협정을 맺었다.1998년(김대중 1년), 러시아 정부는 7월 러시아 주재 한국 대사관의 참사관 조성우를 '주재국 정부가 기피하는 외교관'으로 지목하고 조 참사관에게 기밀정보를 건네준 혐의로 러시아 외무부 아주 1국 부국장 바라렌틴 모이세예프를 국가 반역죄로 기소하는 등 갈등이 심각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이 해 7월 양국 외교관을 맞추방하는 최악의 외교 갈등을 일으켰다. 한국 쪽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경질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였다.1999년(김대중 1년), 김대중 대통령이 러시아에 국빈으로 방문하여 21세기를 향한 미래지향적 동반자적 관계 발전시키는 데 양국이 합의하였다. 이해 5월 한러 원자력 협력 협정과 나호트카 한러 공단 설립 협정을 맺었다. 이해에 러시아 크라신(Krassin) 외무차관이 북한을 방문하여 북러사이의 방위동맹조약을 연장하였다. 러시아는 대북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버리지 않고 있다.한러 간 2억 1천4백만 달러 규모의 1차 사업은 경협 차관 상환으로 충당했고 5억 3천4백만 달러 규모의 2차 사업의 경우 절반은 경협 차관, 절반은 현금으로 지불했다. 한국과 러시아 간에는 서울과 모스크바·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토크를 각각 연결하는 정기항로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는 시베리아 횡단 항로가 열려 유럽의 주요 도시를 보다 쉽게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과 러시아 간의 해운은 부산과 러시아의 보스토치니를 거쳐 나홋카로 연결되는 정기노선이 주 2회 운항되고 있고 2000년(김대중 2년), 러시아 극동의 자루비노항(港)을 경유하여, 육로를 통해 중국의 훈춘을 지나는 정기항로가 개설되었다.2001년(김대중 3년) 2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해 2월 관광 협정을 맺었다.2002년(노무현 4년~2006년(김대중 4년), 2차 사업으로 T-80U, BMP-3, METIS-M, 공기 부양정, IL-103, KA-32A를 들여왔다. 2003년(김대중 1년), 한국 정부는 연 '리보금리+0.5%'로 23년간 분할상환 받는다는 조건으로 재협정을 맺었다. 8월 법무 협력 협정을 맺었다.2004년(노무현 2년) 9월, 우주기술협력 협정을 맺었다.*독립국가연합[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중에 우크라이나 현황(쉽게 설명).요약: 원래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행정구역이었다.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서기장 흐루시초프가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통 큰 선물을 하였다. 소련이 붕괴하자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포함 독립을 한다. 크림반도를 두고 영토싸움이 시작된다.러시아: 크림반도를 돌려다오.우크라이나: 지금은 내 땅이다.크림 자치공화국(크림반도): 나도 독립하고 싶어. 크림반도에 선거를 통해 2014년 3월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한 뒤 러시아와 합병 조약에 서명하였다.크림반도는 특히 겨울은 기후가 따뜻하여 아열대 식생(亞熱帶植生)을 볼 수 있는 특이한 지방이다. 북부지방의 1월 평균기온이 1℃인데 비해 남부에서는 4℃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서 얄타·알루프카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가 여러 곳에 있다.고대에는 킴메르인(人), 그 뒤에는 스키타이인이 지배하였으며, BC 5세기에는 크림반도의 서쪽에 그리스인의 도시국가 케르소네소스 등이 건설되었다. 또한 BC 2세기 후반부터는 로마의 세력이 해안지방에 미치게 되었다. 3세기 이후 남(南) 러시아 평원에서 유목민들의 패권이 교체됨에 따라 고트·혼·아바르·하자르·페체네그·폴로베츠 등이 침입하거나 쫓겨난 데다가 유태인 등이 이주해옴으로써 인종적 조성이 복잡해졌다. 13∼15세기에는 킵차크한국(汗國)이 반도를 지배하였으며, 그 사이에 반도의 남쪽에는 이탈리아인의 무역도시가 생겨났다. 15세기 전반에는 킵차크한국에서 떨어져 나온 크림한국이 15세기 말경 오스만 투르크가 이곳으로 진출하여 이탈리아인들을 쫓아낸 후에 크림한국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크림한국의 타타르인들은 18세기까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해 침략적 원정(遠征)을 계속하였으나, 1783년 러시아 제국이 반도를 병합하였다. 1854~1856년의 크림전쟁 때에는 서해안의 세바스토폴이 공방전의 중심이 되었고, 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하여 흑해로 진출하려던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좌절되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일시적으로 독립하였으나 1921년 소련에 편입되어 크림 소비에트 부산고구려$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주민의 일부가 독일군에게 협력하였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타타르인을 비롯한 많은 비(非) 슬라브계(系) 주민이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고 러시아의 크림주(州)로 격하되었다가 1954년 흐루쇼프 정권 때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다. 1991년 8월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뒤에는 심페로폴을 수도로 하는 크림자치공화국이 성립하였다. 크림 자치공화국 민족 구성은러시아계가 약 58%,우크라이나계가 약 24%, 크림타타르인이 약 12%이며,유태인·독일인·카라임인·아르마니아인·불가리아인·조지아인·고려인·헝가리인·체코인·슬로바키아인 등의 소수민족이 있다.우크라이나는 인구가 44,573,000명(2013년 12월 기준)으로 동유럽에서 가장 많고, 유럽 전체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국가이다. 우크라이나인(人)은 러시아인·벨로루시인과 마찬가지로 동 슬라브족(族)에 속하지만, 다른 동 슬라브족에 비해 키가 크고 어깨너비가 넓다.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은 ‘변방 지대’ 혹은 ‘경계 지방’이라는 의미를 갖는 ‘krai’에서 나왔다. 이는 러시아의 차르(tsar)들이 수 세기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터키인 등을 비롯한 초원의 여러 유목족들에 대항하여 투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우크라이나 국민의 민족 구성은,우크라이나인 73%,러시아인 22%,유태인 1%,기타 소수민족 4%종교는 우크라이나 정교, 러시아 정교, 카톨릭교이다.언어는,우크라이나어(공용),러시아어(상용)수르지크(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 혼용).소련 말기의 통계에 따르면, 소련의 우크라이나인 가운데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인은 86.2%였고, 그중 우크라이나어(語)를 모어로 쓰는 사람은 89.1%였다. 러시아인은 주로 동부지역의 도시들과 남부의 흑해 연안에 집중하여 거주한다.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은 우크라이나인보다 교육수준이 높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다. 서부지역에는 주로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고,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다. 또한 서부지역에는 가톨릭교도들이 많다. 반면에 동부지역에는 러시아 정교를 믿는 러시아인들이 많고, 공업이 발달하였다. 우크라이나의 공용어는 동(東) 슬라브 어군(語群)에 속하는 우크라이나어이고 러시아어도 널리 통용된다. 우크라이나 주민의 대부분은 그리스도교를 믿으며, 그리스도교 중에서 가장 큰 교파는 우크라이나 정교와 러시아 정교, 로마가톨릭교이다. 그 외에 다수의 신교파에 속하는 그리스도교도들도 있고, 유태교도나 이슬람교도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농·공산물을 대량으로 수송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철도(총연장 약 2만 3350km)와 수상교통(드네프르강 수계를 중심으로 수로 총연장 약 5,000km)이 크게 발달해 있으며, 밀도 높은 교통망이 형성되어 있다. 모스크바, 동유럽 국가들과는 철도로 연결된다. 도로 총연장은 27만 3700km이고 포장률은 86%이다. 항구 도시로는 오데사·루간스크·헤르손 등이 있다. 유럽의 유수 항공사들이 취항하고 있으며 2000년 현재 공항은 718개이다2013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에 반발하는 친서방 성향의 시민 저항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친러 세력과 친서방 세력 간에 정치투쟁이 벌어지면서 크림반도 내부에서도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하여 독립하자는 친러 성향 움직임이 일었다. 2014년 3월 3일에는 러시아군이 사실상 크림반도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3월 11일 크림자치공화국과 세바스토폴시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하여 크림 공화국(Republic of Crimea)으로 통일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3월 16일에는 러시아와 합병을 위한 주민 투표가 실시되어 타타르인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압도적 찬성을 얻었고, 2014년 3월 21일 러시아 연방의회의 승인을 거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크림 공화국 합병 문서에 최종 서명하였다. 완전한 합병은 2015년 1월 1일에 있을 예정이다. 이로써 크림반도 전역은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으나 미국과 유럽연합·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국제법 위반 또는 무효라 하여 인정하지 않고 있다.1. 민족 간 다툼드네프르강을 경계로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러시아인은 주로 동부 지역의 도시들과 남부의 흑해 연안에 집중하여 거주한다.서부인 :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 우크라이나어 사용, 친 유럽 성향을 보임.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고 못 산다.동부인: 대부분 러시아인으로 구성,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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